전태일 평전

2018. 5. 30. 20:41

들어가며

지금부터 나를 감동시킨 한 사람에 대한 얘기를 하고자 한다. 그는 바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영화로 더 유명해진 22살의 청년 전태일이다. 그는 가난했으며 가난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노동으로 평생을 보냈다. 그는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 대우조차 받지 못하며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들과 이를 묵인하는 나라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며 이 세상을 마감했다. 어린 소녀들이 어두컴컴하고 좁은 공장에서 하루에 평균 15시간이 넘는 고된 노동을 하고, 각성제를 먹으면서 잠을 쫓으며 심지어는 폐병을 앓으면서까지 노동을 해야 했던, 인간의 최소한의 생활 조차도 제대로 보장 받지 못하던 그 시절에, 전태일은 불합리한 사회의 현실을 참지 못하고, 자신의 한 목숨을 불태우면서 까지 이 사회에 저항한 것이다.

그는 고등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돈이 많은 부유층의 자식도 아니었다. 단지, 평화 시장내의 일개 재단사였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치열한 생존의 현장에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조차 돌보기 힘든 상황을 뛰어 넘어 더 많은 노동자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한 그를 보면서 실로 그는 선구자이며 오랜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존경받을만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전태일은 ‘아름다운’이라는 수식어가 결코 아깝지 않은 그런 인물이다.

 

전태일 평전을 읽고

오래전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전태일 이라는 인물은 전혀 생소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태일 평전이라는 이 책은 나에게 영화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전태일은 1948 8 26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피복제조업체에서 봉제노동자였고 그는 어머니와 태삼이라는 남동생 그리고 순옥이라는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연약한 사람이었으나 판자촌 철거나 행상들이 거리에서 몰려날 때 앞장서서 경찰에 대응할 정도로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전태일이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얘기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의 유년 시절은 가난으로 끼니조차 떼우기 힘든 생활들의 연속이었다. 그의 어린시절 삶은 가출, 노동, 방황이었으나 그래도 그가 가장 즐거웠던 시절은 청옥고등공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는 두뇌가 명석했고 학구열도 매우 강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재봉일을 도우면서 남는 시간에 공부를 하였다. 실제로 그는 그의 수기에서 정말 하루하루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고 할만큼 공부를 한다는 것 자체에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학업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께서 학교를 그만두고 재봉일에만 신경쓰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태일은 동생 태삼을 데리고 서울로 온다. 하지만 그는 그에게 닥칠 엄청난 시련을 예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경험으로 맞닥뜨린 현실은 냉혹했지만 그래도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가장 좋은 교사였을 것이다. 그 형용할 수 없는 현실의 깊은 채찍질로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면서도, 자기의 심장으로 느끼고 머리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의 벌거벗은 모습을 두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사람이야말로, 현실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후 그의 가족은 모두 상경하고 청년 전태일은 1964년 봄, 그의 나이 16살 되는 해 시다로서 평화시장에서 일을 하게 된다. 시다는 재단사, 미싱사가 일을 잘할 수 있게 보조해주며, 하루종일 실밥을 뜯거나 나르는 일, 사적인 심부름을 하는 무척 고된 노동을 요구하는 것으로 그 당시 12~15살의 소녀들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일하면서 평화시장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깨달았다.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는 손도 댈 수조차 없이 엉망이었으며 그들은 환기조차 안되는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저임금으로 매일을 시달리며 정규 근로시간 이외에 야간작업에도 매달려야 했다. 그는 업주들이 너무나 야속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직접 재단사가 되어 노동자들을 많이 도와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가 투쟁에 대해 처음으로 관심을 보이게 된 계기는 한 여공이 각혈을 했을 때였다. 여공의 각혈 이후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처음으로 그는 ‘근로기준법’과 노동조합에 대해 알게 된다. 그러나 그는 직장에서 쫓겨난다. 시다들을 너무 배려한 탓에 업주의 눈에 낫기 때문이다. 그는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설치는 놈을 ‘바보’ 라고 부르는 것에 착안하여 재단사 친구들을 모아 ‘바보회’를 조직하고 ‘근로기준법’ 조문 등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다. 바보회는 모범업체의 설립을 통해 정당한 노동시간과 임금정책, 개선된 작업환경으로도 우수한 기업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업주들은 물론, 국가에 알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근로기준법은 사실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 아니었으며 근로감독관이 기업주와 결탁하여 서로의 편의를 봐줄 만큼 관계는 썩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전태일은 더 이상의 현실에 대한 기대는 모두 버리고 스스로 일어나서 반대편에 대해 저항하며 요구조건이 관철될 때까지 끊임없이 위협적인 도전을 감행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투쟁을 시작한다.

전태일은 그의 투쟁의지와 수많은 노동자의 뜻을 알리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나하나 죽어지면 뭔가 달라지겠지’ 라는 생각으로 1970 11 13일 평화시장에서의 투쟁 중 김개남에게 저들에게 정신을 번쩍들게 하자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이며 아름다운 청년의 숭고한 죽음아래 쓸모 없는 조문들만 가득찬 근로기준법 역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22살의 청년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억울한 노동착취 현실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마지막 방법으로 목숨까지 받치는 모습에 감동 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부분과 유서를 읽는 부분, 그리고 전태일이 병원에서 나눈 어머니와의 대화 부분에서는 특히나 가슴이 아려왔다. 평범한 재단사로서 조금만 고생하면 곧 독립하여 자신의 가게도 열 수 있는 상황을 떠나 어린 여공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도와주는 그의 모습에 나는 전태일의 따뜻하고, 착한 그의 심성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자신 역시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버스비를 털어 여공들에서 밥과 간식거리를 사주는 모습에서는 정말 자상하고 인간적인 미를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어느 한가지 일에 몰두하고 매진하며 앞장서서 일을 처리하는 전태일의 선구자적 모습에 감동하였다. 그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결국 그가 최후의 방법으로 죽음을 택한 것은 너무나 아쉽지만 그의 정신은 아직도 노동자들의 가슴에 불타 오르고 있을 것이다.

전태일의 배움에 대한 열의는 정말이지 대단했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그는 자기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을 시기가 청옥고등공민학교 시절이라고 말할 정도로 배움을 즐겁게 생각하였다. 근로 기준법에 대해,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고 모를 때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하였으며 때를 가리지 않고 동네 대학생한테 궁금한 것을 물어 보던 모습에서 배움에 대한 그의 대단한 열의를 느낄 수 있었다. 전태일의 이런 모습에 대학생활 동안 공부에 소홀히 하고 틈만 나면 빈둥거리며 놀고 싶어하던 나의 모습이 비교가 되면서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책 중간 중간에 삽입된 전태일의 일기형식의 수기는 참으로 흥미롭다.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낙서에서조차 전태일의 생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었으며 핵심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차근차근 논리적으로 풀어 쓴 글들을 보면서 이게 과연 중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사람이 쓴 글일까라는 생각에 놀라움마저 들었다. 글은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을 반영하는데 전태일처럼 어려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이렇게 알찬 자신을 키울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것은 비록 그가 생활은 어려웠지만 마음만은 부유하게 가졌고,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자심감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노동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

전태일 평전을 읽고 나서 노동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전태일의 죽음은 사실 평화시장의 일개 노동자의 죽음이지만 이 사건은 후에 사회의 큰 이슈가 되었고 그의 뜻이 세상에 전해짐에 따라 사회단체, 학교, 종교 단체에서 까지 노동 관련 투쟁을 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역시 투쟁에 대한 동기 유발을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솔직히 나는 전태일에 관한 영화나 책을 보기 전에는 노동 현장을 직접 경험 해 본 적도 없었을 뿐 아니라 노동 운동이라는 단어자체가 좀 생소했고, 거부감까지 들기도 했었다. 그러나 노동자에게 생존을 위한 투쟁이 얼마나 절실했으면, 평화시장의 평범한 피복공장의 재단사인 한 젊은 청년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조금이나마 그러한 현실들이 이해가 되었다. 나는 아직 노동 현장에서의 사회 부조리를 몸으로 체감한 경험은 없지만 ‘전태일 평전’을 통해 노동 현장의 부조리를 간접적으로 조금이지만 경험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전태일은 중학교도 나오지 못한 그야말로 못 배운 사람이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모순의 한 가운데 서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행동으로 그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의 죽음을 도화선으로, 억압 받고 있던 노동자들이 불만을 갖게 하는 요소들은 있는 그대로 사회로 노출되었고, 이러한 불합리한 노동환경은 사회문제로 인식되어, 지금까지도 노동운동은 지속되고 있다.

 

나오며

이 사회에 전태일이라는 신화가 생겨 난 것은 바로 잘못된 사회의 구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전태일이 살던 시대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구석구석에는 소외된 자들이 살아가고 있다. 소위 기득권층이라는 어마어마한 권력의 세력에서 멀리 떨어져 하루하루 열심히 벌어도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아직까지도 우리 나라는 부한 사람은 부를 더 축적해가고 빈한 사람은 더 빈해져만 가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계속 되고 있다. 이 나라의 기득권층이 변하지 않는 한, 그들이 개혁 하지 않는 한 또 하나의 비극적인 전태일이 생겨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나는 소위 대학생으로 여러 가지를 듣고 배우면서 소양을 키워가고 있다. 아직은 많이 매우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 더 나아가 이 나라의 합리적인 제도개선과 의식구조를 바꾸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있다. 전태일의 그 용기와 사랑 하는 마음을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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